한국in필리핀 > 필리핀의 치의대를 나와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말라위에서 의사가 된 한 청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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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in필리핀 > 필리핀의 치의대를 나와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말라위에서 의사가 된 한 청년의 이야기.

피치알리스 발행일 : 201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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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 나는 의사가 되었다.


이번 포스팅은 아무래도 의미있는 포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해외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이야기는 값진 보석과도 같다.

얼마 전 지인으로 알게된 힘찬씨의 이야기가 정말 가슴에 와 닿아서 꼭 많은 이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셀 수 없이 포기라는 벽을 뛰어 넘어야만 했던 힘찬씨의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한다. 





집 떠난지 210일 째.

 

2015년 8월, 세계일주를 하려고 나온건 아니였다. 꿈을 이뤄내기 위해 한발짝 내딛어보니 나도 모르게 세상 밖으로 나와있었다.

 

나는 대학을 다닐적에 '의사가 되고 나면 의료 세계일주를 해야지!' 하는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의사가 되고 의사가 된다면 각 나라를 돌면서 무료 의료 봉사를 하자. 그렇게 마음먹은지 2년, 한국 땅을 떠나 가능성이보이지 않았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난 여행은, 

이 여정을 시작한지 210일이 지난 후에야

 

캐나다 - 리투아니아 - 폴란드 - 헝가리 - 루마니아 - 몰타 - 이탈리아 - 네덜란드 - 프랑스 - 스페인 - 모로코 - 이집트 - 에티오피아 - 케냐 - 틴자니아 - 말라위 등의 나라들을

 거쳐 그 꿈을 마침내 이룰 수 있었고 

나는 드디어 내가 원하는 그런 의사가 되었다.

 

지난 시간들의 내 고생과 노력, 열정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여정을 이 글에 담아냈다. 더불어 지금까지 이 여정을위해 물질로 마음으로 후원해주고 응원해준 모든

내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p.s. 좀 아주 많이 긴 글이다. 그래도 지루하진 않을것 같다 (?)








@히말라야 산악 중 만났던 강진.


의사가 되고 싶었다.

 

 

치의학을 전공한 나는 돈을 많이 버는 치과의사가 되기 보단 세계 곳곳을 다니며 봉사하는 그런 의사가 되고싶었다. 하지만 필리핀 치의학을

졸업한 나로썬 한국에선 필리핀을 인정해주지 않고, 필리핀에선 그 나라 나름대로외국인에게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다른 나라로 떠나 내 스스로 기회를 잡아야 했다. 내 위의선배들은 졸업을 했음에도 의사가 되기를 포기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치만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내 가능성을 믿고한국을 떠났고, 그렇게 내 여행을 시작했다.

 

15년 4월에 졸업을 한 나는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하기 위해 네팔로 떠났고 트레킹 중 홀로 7.9의 지진을 맞아 부상과 함께히말라야에 고립이 되었었다. 4200m 지점에서 지진의 후유증과 고산병이 함께 찾아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을 때하나님께 기도했다. 살려주신다면 주를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안전하게 하산시켜 주었고 나는한국으로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4개월을 보낸 후 캐나다 국시를 보기 위해 8월에 벤쿠버로 떠났다. 중국을 18시간 경유해거진 30시간이 걸려 벤쿠버로 도착한 나는 공항에서의 인터뷰를 하는 도중 캐나다 국시를 보러 왔다고 하면 외국인들이그대로 눌러 앉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캐나다 정부에게 입국이 거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아는 지인에게 듣고 그저 여행을하러 왔다고 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따지고 짐을 검사하는 인터뷰는 3시간 정도 진행됬고 나는 이민국에서 8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며조사를 받았다.

여행을 하러 왔는데 졸업 서류를 가지는 왜 가지고 왔는지 등을 묻고 내 카톡과 페이스북 메신저, 가방에 들어있던친구들이 써준 편지 등을 한국인 통역관이 하나하나 다 검사하고 읽어 내려가며 내가 여행하러 온 것이 아닌 국시를 보러왔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들은 내게 화를 내며 왜 거짓을 말했냐고 했고 나는 사실대로 말하면 입국 금지 당할 것을 걱정해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결국 나는 다음 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입국 거부를 당했다. 그 자리에서 수갑을 차고 이민국 밖으로 나가니많은 사람들이 쳐다봤다. 범죄를 저지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나는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민국 직원과경찰은 나를 보호소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니 콜롬비아와 미국 출신의 불법 체류자들이 있었다. 나는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홀로 방에 틀어박혀밥도 먹지 않고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혀 좌절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목적으로 의사가 되고 싶어 캐나다로왔지만 그곳에 뜻이 있지 않았나보다. 그곳에서 자다가 새벽에 깨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그러면 안되지만 살고싶지 않은마음까지 들었다. 입국 거부에 수갑까지 차고 힘들게 온 이곳에서 다음 날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야 한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나는 정말 다른 말은 표현이 안될 정도로 좌절과 깊은 상실감, 우울감, 무력감이 들어 그 날 밤을그렇게 지샜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중국을 18시간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월요일날 출발해 도착하니금요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여전히 우울했다. 여전히 좌절했다. 이 긴 여정의 첫 도전은 그렇게 시도도 해보지못하고 실패의 쓰라림을 맛봤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1주일을 그렇게 좌절감에 빠져있던 나는 더이상 이렇게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유럽의 리투아니아에아는 형이 공부를 하고 있고 그쪽에 길이 있다고 들어 바로 비행기 표를 끊고 그곳으로 날라갔다.


유럽에 희망을 품고 날라갔던 그 곳에서는 또 다른 고생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졸업을 벌써 한 후 였고 그학교들에서는 졸업한 내가 왜 다시 학교로 편입을 하려느냐, 니네 나라에선 왜 자격증을 따지 않느냐를 물었고 나는 내가공부한 필리핀의 학교를 한국에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하고 필리핀에서도 외국인에게 자격증을 딸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말했다.

 

그러더니 그들의 대답은 '그럼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필리핀으로 가서 공부를 했느냐' 였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그래도 기다려 보라는 학장의 말을 듣고 2~3주 정도를 리투아니아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며 보냈다.

 

그러곤 결과가 나왔지만 결국 다시 본과 1학년으로 편입해 4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는 등 그런 결과였다. 결과를 알게 된나는 그 곳에서 더 이상 머무르기 지겨워 밑의 나라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루마니아로 갔다. 각각의 나라에서 학교와교육청을 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혹 내가 학교를 편입해서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방법이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고.

 

폴란드와 헝가리 또한 가망이 없거나 학비가 너무 비쌌다. 루마니아 교육청과 학교에선 자기들이 뭘 하는지 도통 모를정도로 답답하게 굴었다. '클루즈 나포카'라는 교육 도시의 학교를 가서 자격증을 물었더니 9시간 정도떨어진 '부큐레슈티'에 있는 교육청으로 가 거기서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당장 갔다. 그 교육청에 가서 겨우겨우 교육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얻은 결과는 그것에 관한 일들은자기들이 관리 하는게 아니라고 다시 9시간 떨어진 학교로 돌아가 물어보란다. 나는 한번 더 좌절하며이번엔 '야시'라는 '클루즈 나포카'의 정 반대방향에 있는 도시의 학교로 다시 또 9시간의 버스를 타고 갔다. (가기 전에전화를 수십번 했는데 전혀 받지를 않았다.)

 

그곳의 학교에 가 학장과 이야기를 하니 이건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부큐레슈티'에 있는 교육청으로 다시 돌아가란다. 나는열이 받음과 동시에 자기들이 뭘하고 누가 뭘 관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분노했다. 그래도어쩌겠는가. 지들 관할이 아니라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9시간을 타고 다시 부큐레슈티로 내려왔다.

 

그곳은 일주일에 화,수,목 3일동안 1시간 반씩 밖에 일하지 않아 교육청에 가서 교육청장을 만나기가 여간 쉽지 않다. 나는루마니아에서 또 그 짓거리를 하느라 2주 반의 시간을 허비했고 다시 만난 교육청장은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를 반복하며나에게 자긴 계속 모른다고 일관했다. 나는 다른 여러 나라들을 거치며 계속해서 좌절을 한 상태였지만 또 한번 좌절을했다.

 

결국 루마니아도 아닌가 보구나 하고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나는 이 곳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다른곳도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시도해보려는 질긴 마음으로 끊임없이 시도해 다음 나라인 몰타로 갔다.

 

몰타로 간 나는 우선 대학교로 찾아가 학장을 만나고 총장을 만나고 치대 학생들을 만나고 교수들을 만나 자격증에 관해물었다. 그곳에서는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였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육청에 가보니 내 졸업장을 인정해 준다는이야기였다. 대신 한달 정도 검토기간이 걸린다고 한달 후에 오라고 했다. 한가닥 희망이 보였다. 기쁜 마음에 서류를준비하고 그들에게 주었다.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와 많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는 이제 막 졸업하고 치과의사가 된경우였는데 한달에 3000유로, 4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받을 수 있을거라 했다. 나는 마음이 흥분됬고이젠 일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이태리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태리 피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에서도 혹시 몰라 교육청에 가 서류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가서 순례자의길을 걸었다. 순례자의 길을 걷고 난 후 몰타로 다시 돌아갔다. 돌아가보니 10일 정도 더 기다리란다. 그래서 기다렸다. 10일 후에 다시 교육청으로 가보니 설날과 새해 연휴로 앞으로 1월 중순 까지는 쉴테니 한달 후에나 다시 오란다. 근데 내유럽 비자는 그 때 당시 5일 정도 밖에 남질 않았었다. 결국 나는 희망을 품고 두달 가량을 기다려 몰타로 다시 왔지만 나를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좌절이었다. (네덜란드나 프랑스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이제는 유럽 대륙을 떠나야 했다. 더 머물다간 불법 체류자가 되어 유럽 땅에 까지 발을 딛지 못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결정을 했다. 아프리카로 가기로. 여러가지 마음이 있었다.
 
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에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싶었고 선교사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도 배우고 싶었다. 근데 돈이없었다. 그래서 글을 써서 친구들에게 내 소식을 알렸다. 많은 지인들이 힘내라고 응원하며 후원을 많이 해주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이집트로 들어가 카이로의 교육청을 가보고 학교를 갔지만 거긴 아랍권이라 아랍어를 하지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선 한국인 의사를 만나 자격증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자격증을 따는 절차가 너무까다롭고 힘들기 때문에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케냐로 내려갔다. 케냐와 탄자니아 등을 여행했고 말라위에도착했다.
 
나는 벌써 의사가 되려는 마음을 거의 접고 있었다. 어짜피 되지도 않을거란 불신이 가득했다. 그러던 중 말라위에서일하고 있는 콩고 의사를 만났다. 그는 나와 이곳 교육청장을 만나게 해준다고 말했고 그에게 데려갔다. 나는 지금까지내가 의사가 되려 여행했던 모든 일정, 캐나다부터 지금까지 약 7개월간 노력한 모든 것들을 다 쏟아냈다. 그는 감동한 듯내가 이야기를 끝낸 후에도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기가 힘을 써보겠단다.
 
그리고 몇일 후, 원래는 여기서 일을 하려면 자격증이 먼저 있어야 하고, 이 나라의 언어를 해야하고 5~6개월을 기다려야하고... 등등 어쨌튼 먼저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특별 케이스로 자기가 힘을 좀 써줬다며 나에게 자격증 시험을보고 통과한 후 한달 반 가량의 치의학 프로그램을 여기서 먼저 하고 그것을 마치면 내게 자격증을 주겠다고 말을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내가 의사가 되는건가?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시험을 보고, 패스를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던 치과의사가, 정말로 되었고 이곳 국립병원의의사들과 환자들은 나를 '닥터정'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난 시간 얼마나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이 있었는가. 유럽에서 4개월간의 시간과 아프리카에서 3개월의시간 동안 '치과의사' 라는 목적 하나만을 가슴에 품고 여행했다.
 
각 나라의 교육청장들을 만나고 대학의 총장을 만나고 학장을 만나고 교수들을 만나고, 그 나라 학생들을 만나고여행자들을 만나는 이 여행의 시간 동안 나는, 체게바라가 9개월간의 여행이 끝난 후 돌아왔을 때 이 전의 자신과는 다른자신이 되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써놨듯, 나 또한 7개월 전,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내 자신과 지금의 나는 나의 가치관과생각, 비전, 할 수 있다는 믿음, 도전 의식, 사람/사물을 보는 눈 등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이 기나긴 여정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여정이 아니었다. 각 나라 교육의 최전선에서생활하고있는 그들과 마주했던 대화들은 결코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아니했고 내가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밑거름으로, 더 위대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왜 내가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를 생각하게 했고 '왜내가 의사를 하고 싶은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오랜 여행으로 인해 나는 늙었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 내 자랑 중 하나였던 근육들도 다 빠져버렸고, 피부 또한 좋지않아졌으며, 옷도 매일 거지같이 입고 다니는 통에 백수, 거지, 한량, 방랑자, 여행자 나부랭이 등의 별명들이 붙었지만 나는그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를 하나하나 깨닫고 배우며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늙어버릴 멋드러진 외모가 아니라, 남들에게 자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치장하는 명품들이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모아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종잇조가리, 돈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배운 어떤 것들이 누군가에게 필요로 한다는것' 등에 인생 최고의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결국 간절히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결국 그 꿈의 옷자락을 움켜쥐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 첫번째나의 꿈을, 아무도 하지 않았던 시도를 통해, 좌절하기를 몇백번 하며 그래도 포기치 않고 노력한 결과 내 꿈을 이뤄낼 수있었다.

 

캐나다나 미국에 내가 그 꿈을 두고 지금 그곳에 가있었다면 나는 비싼 체류비와 학비 등으로 인해 돈을 엄청 쓰고 있었을것이다. 만약 캐나다에서 입국 거부 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겠지, 만약 유럽에서 내가 의사가 됬다면한달에 400만원 받는 월급이 좋아 내 본분의 목적, 즉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그 광야의 길로 던지셨고, 나를 훈련 시키셨고,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나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 나라로 오게해 다른 의료선교사들과 함께 봉사를 통한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으며, 돈에대해 자유할 수 있도록, 선교사역에 동참하고자 무료 의료 봉사를 1년 정도 하게끔 마음을 주셔 그렇게 하고자 결정했다.

 

내게있어 치과의사라는 직업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여행을하면서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그렇게 무엇인가가 많이 필요하지 않구나, 적당히, 하루 삼시세끼 먹을 수 있는 밥과입을 수 있는 옷가지 몇개, 카톡 정도는 돌아가는 스마트폰 정도, 딱 이정도만 되어도 지금 현재 살아가는데 별 불편함이없구나 라는걸 깨달았다.

 

차가 없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고 최신 스마트폰 따위는 그저 허영에 찌든 우리의 과시욕에 불과하다. 내가 이렇게필요한 몇가지만 가지고 여행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에,그리고 아무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가고 있기에, 큰 집에 살지 않아도바람과 모기를 막아줄 벽이 있는 몸 누일 집과 책 읽을 공간만 있으면 난 만족한다.

 

한국의 반대편인 이 곳에서는 우리가 한국 홍대에서, 강남에서, 각종 클럽과 커피숍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여자/남자를만나기 위해 애절한 노력을 하는 동안 굶어 죽는 이들이 진짜로 생긴다. 하루에 한끼먹는 아이들은 그래도 다행이고 한끼도못먹는 아이들이 진짜로 있다. 하물며 고통이 있다 한들 의료 진료를 감히 받을 수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잠시 세계 여행을 멈추고, 이곳에서 1년정도 의료선교에 도움이 되려고 마음 먹었다. 내가 되고싶은 어떤목적이, 나의 것이라면, 나의 이익과 어떤 야망을 취하기 위해 꾸는 것이라면 인간의 방법으로 알아서 잘 찾아가야한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꿈이란걸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의지하고,담대하게나아간다면 언젠가는 그 꿈을, 하나님의 그 꿈을 이뤄 내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사실 이곳에서 또한 자격증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가서 Pct 하이킹, 멕시코에서 부터 캐나다 까지의장거리 하이킹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여권에 문제가 생겨 그것을 포기했고, 내것을 포기했더니 하나님은 또 다른, 어쩌면 더좋은 의사가 되는 길을 준비시켜 주셨다.

 

앞으로 1년간은 이 곳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도울 생각이다. 생활이 뭐 딱히 어렵다거나 힘들진 않다. 그냥 돈을 안받고사역을 하니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이 없었다. 

근데 돈이 없을 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그리고 넘치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채워주신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마음은 약간 불안할 때가 있다. 그래서 후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은 막지 않으니 부담없이계좌번호를 물어봐도 된다. 아주 웰컴이다. (ㅋㅋㅋㅋㅋㅋ)

 

이곳은 수시로(이틀에 한번 꼴) 물이 몇시간씩 끊기고 정전이 4~5시간씩 되는 곳이다. 말라리아가 걸릴 수 있는 위험이많이 높은 곳이고 에이즈에 감염된 국민들은 14%가 넘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고 한다. 가끔 총을 든 강도님들이 떼로방문해서 총구를 머리와 입구녕에 집어 넣고 돈을 내놓으라며 위협하는 곳이다.

 

여기에 계신 선교사님들 대부분은 이런 강도님들의 방문을 다들 받으셨단다.

 

그래서 솔직히 좀 무섭고 막막하긴 하다.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곳에서 사역을 한다면 잘 해낼 수 있을까.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지는 않을까. 에이즈 환자를 치료할 때 혹 어떤일이 생겨 감염되지는 않을까. 총강도 님들과 깊은 만남이라도 가지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긴 하지만 이런 걱정과두려움에 사로잡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이 한 발자국 조차 내딛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의 긴 여정, 그 세월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그 분이란걸 알기 때문에 나는 내 상황이아무리 위험하고 고단한 가시밭 길이라 할 찌라도 그 길을 걸어가보련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위해 고통 당하셨으니,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떤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고난은 결국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라 확신한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시간 동안 나를 더욱 더 다듬어 가실 그분을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드린다.






참 멋진 이야기입니다. 

꿈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는 모습에 많은 영감을 얻게 되네요. 

글을 읽으셨다면 아시겠지만 힘찬씨는 현재 말라위에서 의료봉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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